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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행정 구역 개편과 충북 근대사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6.01.28 조회수 : 11

[2026. 01. 28.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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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충북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미래를 그려 나갈 것인가? 마침, 올 6월에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이러한 때일수록 도민들이 함께 지혜를 모으고, 지자체 간 협력과 민·관 거버넌스가 중요할 것 같다.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하여 충북 근대사, 특히 1920년대부터 제기된 ‘폐도설’ ‘도청 이전설’의 위기에 어떻게 충북이 하나가 되어 그 정체성과 행정적 위상을 지켜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지방행정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한 시기는 구한말 서구의 근대적 행정 체계가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부터 충청남북도는 팔도제 체제에서 ‘충청도’라는 하나의 행정 단위로 살아왔다. 고종은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 5월 칙령 반포를 통해 이 팔도제를 폐지하고, 일본의 현(縣) 중심 행정 체제를 본뜬 23부제를 전격 추진한다. 비대한 관찰사의 권력을 해체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일본 메이지 정부의 행정 모델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이 23부제 체제에서 충주부는 총 21개 군을 관할하게 했는데, 충북의 중·북부 모든 군을 비롯해 경기도의 여주, 용인, 이천, 안성, 강원도의 원주, 정선, 평창, 영월 등을 두루 포괄했다. 당시 공주보다 인구가 많았던 청주를 비롯한 충북의 남부 전 군은 모두 공주부에 속했다.

 하루아침에 조선 8도가 사라진 것이다. 이는 수백 년 유지된 지역 정체성의 붕괴를 불러왔다. "나는 어느 도 사람인가?" 여기에다 관아의 위치 변경, 조세(세금), 사법(재판) 체계에 큰 혼선을 초래한다. 이 졸속 제도는 지방의 유생, 일반 백성의 반발에 부딪쳐 1년여 만에 막을 내린다. 

 이에 고종은 이듬해인 1896년 8월 칙령 제36호를 통해 기존의 8도 체제를 인정하고 대신, 비교적 규모가 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5개 도의 남북을 분리하여 13도 체제로 개편했다. 교통, 통신이 크게 불편했던 시대에 관찰사가 광범위한 도 전체를 통제하는, 느슨한 행정으로는 근대적 국가로 나갈 수 없다는 고민이 깔려 있었다. 이 13도제 실시로 비로소 ‘충청북도’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도의 관찰부(도청)는 직전 충주부의 소재지인 충주에 두었다. 조선 후기 한수 이남에서 최대 인구 규모를 가졌고, 15세기 중반에서 1602년 공주로 이전하기 전까지 감영이 설치돼 충청도 수부를 자처해 왔던 이곳에 다시 관찰부가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충주의 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조선의 마지막 임금 자리에 오른 순종은, 1908년 5월 칙령 제30호, "관찰도 위치 위치표 중 충청북도 청주 개정건을 재가(裁可), 반포함"을 통해 충북도의 관찰부 위치를 청주로 옮긴다는 사실을 공식화했다. ‘재가’라는 단어는 황제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허가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 건의의 주체가 누구인지 궁금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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