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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일제강점기 충북에 주소지를 두고 활동한 미술인들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9.17 조회수 : 1

[2025. 09. 17.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52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조선미술전람회(이하 ‘鮮展’)는 1922년 1회를 시작으로 44년 23회까지 치러졌다. 우리는 선전 공모 결과를 통해 지역 1세대 미술인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언론, 관보, 전람회 도록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출품 시 내는 원서에는 주소지를 쓰게 했다. 결과 발표 때도 이를 토대로 수상자의 거주지를 공개했다. 이를 참고하여 세 부류로 구분해 정리해 보도록 한다. 

 첫째, 주소지를 충북으로 한 미술인이다. 둘째, 충북 출신으로 타지에서 활동한 작가이다. 이 경우에는 출생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셋째, 출신지나 주소지가 충북이 아니더라도 이후 충북에 정착하여 지역 미술계와 인연을 맺게 된 유형이 있다. 

 우선 주소지를 ‘충북’으로 해서 수상한 이들부터 살펴본다. 수상자는 총 28명으로 작품 수는 총 59점이다. 이 중 한국인은 총 9명이며 작품 수는 16점이다. 지역을 보면 청주가 19명으로 압도하고, 충북 3대 도시의 위상을 지녔던 영동이 5명, 충주 2명, 제천 1명, 충북까지만 소개된 경우가 1명이다. 

 분야별로 보면, 우선 동양화(사군자 포함, 1932년부터 동양화에 흡수)는 총 9명 수상자에 수상작은 총 20점이다. 한국인 수상자는 총 5명이며 작품 수는 9점이다. 가장 많은 실적을 낸 이는 ‘한규복’으로 충북도지사 재직 시(1926.8.∼1929.11.) 사군자 그림으로 총 5점의 입선작을 냈다. 蘭花로 입선한 박희석은 영동 심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전시회, 강습회를 통해 도내는 물론 신도시로 부상하던 대전의 서화 문화 정착에도 기여한다.

 서양화 부문에서는 일본인 비중이 크게 높다. 총 13명 수상자에 작품 수가 25점인데, 그중 한국인은 2명, 작품 수도 3편에 그친다. 한국인은 강점기 말에야 등장하는데, 특히 44년 ‘풍경’으로 입선한 청주사범의 학생 이기원은 해방 후 국전 초대 작가로 성장한다. 

 조각에서는 일본인 ‘야마다 카이치로(山田嘉一郞)’의 29년, 30년 입선작 2점이 있다. 강외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자신의 재능과 강외면 특산인 도자기를 결합, 조형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도 했다. 문화예술로 부가가치 창출을 시도한 첫 사례라 할 만하다.

 1932년 신설된 공예 부문에서는 총 3명 수상자에 10점 수상작을 냈다. 공예는 금속,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로 응모할 수 있었지만, 충북은 모두 ‘자수’로만 수상한 특징이 있다. 한국인 입선자는 청주공립고등여학교 교사 박여옥으로 35년과 37년 총 3점의 실적을 냈다. 그는 자수공예로 미술계에 우뚝 서 해방 이후에도 큰 활약을 한다.

 한편, 1932년에 폐지된 서예 부문에서는 2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중 한국인은 23년 사선생화상찬(四先生畫像贊)으로 입선한 영동의 권구현이다. 그는 서예를 비롯하여 동양화(2점) 서양화(1점) 등 세 부문에서 성적을 낸 다방면 미술인이었다.

  충북을 주소지로 하여 수상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전업 미술인은 드물고, 일부 사원, 관공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교사로 확인된다. 이들은 전보에 따라 지역을 옮겨 다녔고, 그곳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전시회도 열었다. 따라서 충북의 근대미술이 기틀을 다지는데 이들 미술 교사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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