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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조선미술전람회와 충북의 미술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9.03 조회수 : 1

[2025. 09. 03.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49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미술사의 ‘사건’ 중의 하나는 총독부가 주관하여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총 23회에 걸쳐 시행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 선전(鮮展)]였다. 이 ‘선전’은 충북 지역 미술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전근대에서 근현대 미술로의 전환이라는 중차대한 시기, 이 이벤트를 통해 충북 지역 1세대 미술인들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전국적 단위의 전람회는 ‘선전’ 외에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된 민간 서화협회(1918∼1936) 주도의 ‘서화협회전람회’(서화협회전, 1921∼1936, 15회)가 있었다. 회원전 성격을 가진 서화협회전과 달리 선전은 국내에 거주한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에 거주한 이들에게도 문이 열려 있었다. 한 해 앞서 서화협회전이 개최되었지만, 참가 규모나 일반 대중의 관심사 측면에서 관제의 ‘선전’을 당할 도리가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선전’은 일본의 제국미술원전람회전 체제를 그대로 가져와 시행한 만큼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로의 전략 수정 이후 본격화된 이 이벤트는 근대미술의 초입부에서 한국미술이 일본 미술의 영향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했고, 일부 회화 양식은 오랫동안 ‘왜색풍’의 꼬리표를 달도록 했다.

 명칭에서 드러나듯 서화협회전이 우리 전통의 서(예), (동양)화 중심으로 진행된 것과 달리, 조선미전은 근대미술의 전 장르를 망라했다. 공모 분야를 보면,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및 조각, 제3부 서예의 3개 부로 시작, 1932년 11회 때부터 서예 부문이 빠지고 ‘공예’가 신설됐다. 출품작들은 심사를 거쳐 낙선과 입선, 특선으로 구분되었고, 입선작 이상은 약 3주간의 전람회를 통해 전시의 ‘특권’도 누렸다. 내리 입·특선을 한 청주의 김복진이나 진천의 김주경은 미술계의 ‘스타’로도 등극한다. 어쨌든 선전은 한국 근대미술의 도입기에서 특히 서양화, 조각, 공예 분야의 정착에 크게 이바지했다. 신진 작가의 등용문이 된 이 선전을 거쳐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후 한국 미술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참여 규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출원 작품 수가 1920년대는 팔백 점 내외였다가 1930년대에 이르면 천 점을 상회한다. 서양화가 압도했는데, 1920년대는 전체 출품작의 50% 정도를 차지하다가 1930년대는 80% 이상이 된다. 1934년의 경우, 전체 출품작 1,162점 중에 서양화가 947점이나 되고. 이 중 입선 이상은 176점, 낙선은 771점이다. 서양화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입선작에 들기 위해서는 매회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서양화는 5,6대 1, 동양화는 2대 1, 공예나 조각 역시 이보다는 낮았지만, 경쟁을 거쳐야 했다. 내 나라 내 땅에서 치러진 것이었지만, 일본인의 벽도 넘어야 했다. 20년대 한국인의 입선 이상 비율은 30% 초반대를 차지하다가 1930년대 들어 40%대에 근접한 성장을 보여준다. 이들 입선작 중에서 ‘특선’도 뽑았다. 분야를 통틀어 총 10점 남짓으로 시상도 했다. 천여 점 출품작에서 출발하여 최종 10여 점에든 것은 개인은 물론 그의 주소지에서도 ‘영광’이었다. ‘선전 시즌’인 5월이 되면, 각 언론은 ‘모모 지방에서 화가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로 법석을 떨었다. 

  그러면 충북은 어떤 성적(?)을 거두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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