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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지역 최초의 가요, 영동의 양산가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4.16 조회수 : 9

[2025. 04. 16.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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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과 옥천은 삼국통일 이전 백제와 신라가 국경선을 맞댄 지역이다. 특히 영동군 양산면을 꿰뚫고 흐르는 금강 상류 양강 연안은 ‘핏골’ 전설이 말해주듯 명운을 건 두 나라의 전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양산가’ 역시 서기 665년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가 남긴 하나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양산가의 배경사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열전 제7 김흠운조에 감동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김흠운(?∼665)은 신라 내물왕 8대손으로, 태종무열왕의 사위이자, 신문왕의 장인이기도 했으니 최상층 귀족 신분이었다.

‘사기’에는 화랑 출신인 김흠운이 낭당대감(郎幢大監)의 중책을 맡아 양산 전투에 참여, 풍우를 무릅쓰고 병사들과 감고(甘苦)를 같이 하였다는 것. 하지만, 양산 아래 군영을 세우고 조천성(助川城, 양산면과 양강면 지역에 있던 백제성)을 치려던 차에 백제군의 야습을 받으면서 일시에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고 했다. 휘하장수들은 “적들이 어둠 속에서 공격해 와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으니, 喪事가 나면 상사 난 줄을 누가 알 것이며,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족이요, 대왕의 아들 같은 사람이니 만약 적병 손에 죽는다면 백제에는 큰 자랑거리요, 신라에는 더할 수 없는 수치가 될 것”이라며 피하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는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이미 이름을 나라에 허락했으니 남이 알고 모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며 단기필마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는 것. 이를 본 휘하장수들도 달려 나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다. 고귀한 혈통으로 가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의 아낌과 선망을 받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기꺼이 국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김흠운, 또 그를 따른 휘하장수들을 애도하기 위해 사람들은 ‘양산가’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배경 이야기와는 달리 양산가의 가사를 실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원 소스’가 가진 서사와 노래의 힘 덕분에 1,30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양산가는 구전가요로 살아남았다. 또한 식자들은 부재한 가사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한시로 양산가를 창작하여 작품으로 남겼다. 우리가 접하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로 시작하는 구전민요 양산가, 또 조선 초 김종직(1431-1492)이 동도악부 7수 가운데 하나로 쓴, “敵國爲封豕, 荐食我邊疆(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 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로 시작하는 한시 ‘양산가’(점필재집 시집 제3권)가 각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양산가는 영동 송호국민관광지 내 ‘양산가 비’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지역 최초 음악이자 (구비)문학 성격을 갖는 고대가요 ‘양산가’가 여럿 있으며, 그중에는 우리가 좀 더 주목할 만한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하나는 1930년대 1세대 국문학사가 김태준이 영동을 직접 답사하고, 지역 명창으로부터 채집 기록해 둔 구전가요 양산가이며, 또 하나는 이광사(1705∼1977)가 남긴 한시 양산가인데, 이 시에는 다른 데는 없는 김흠운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치열했던 전쟁도 세월이 흐르면 한낱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소환하느냐에 따라 살아 소통하는 위대한 콘텐츠로 거듭날 수도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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