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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지역 1세대 공연예술인, 청주의 예기(藝妓)들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4.02 조회수 : 8

[2025. 04. 02.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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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활성화에는 서울과 지역을 동시에 활동무대로 한 박팔괘의 영향이 컸다. 그는 국악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니, 무대에 서지 않을 때는 기생 등을 대상으로 가야금과 병창을 가르쳤다. 서울과 지역의 가교역할로 국창급 소리꾼들이 수시로 청주와 충북을 찾아 공연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이러한 학습과 체험 덕분에 지역에서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김석구, 김갑자, 김갑순 등을 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 1916년 12월에 문을 연 청주의 앵좌와 1928년 9월 개관한 청주공회당이 ‘공연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극장 이전의 무심천 야외무대에서도 공연 기록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날씨와 시간(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실내 공연장 확보는, 창극을 비롯한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양식의 국악 실험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항시 지역 공연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청주예기조합’ 등의 예인 집단이 존재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각종 구제와 명절 행사 등 앵좌의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이들이 이 예기 집단이었다. 청주의 대표적 요릿집 ‘태평관’의 최산월, 정금주, 공운선 ‘영락관’의 김옥희, 윤계화 ‘영흥관’의 오약산, 장연화 등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영락관의 윤계화는 이동백 박팔괘와 한 무대에 서기도 한 청주를 대표한 예기였다.

1931년 신문에 충북의 예·창기 통계가 나와 있는데, 도내에는 요릿집 19개와 음식점 1,194개소가 있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기생 수는 ‘유형’별로 예기가 109인, 작부(창기) 37인, 고용녀 83인 등 총 229명이며, 교육 정도는 소학 66인, 중학(중·고등학교 통합체제) 졸업 10명, 소학교 중퇴 61명으로 나와 있다. 그들의 학력은 생각보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예·창기 간에도 민족 차별이 있었다. 1938년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예기의 월평균 수입은 42원 9전인데 비해 일본 예기는 104원 8전 한편, 작부는 일본인이 112원 80전, 조선인은 71원 98전이었다. 조선인 예기는 작부에 비해서 크게 적었고, 일본인 예기에 비해서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처우에도 조선인 예기들은 틈틈이 악기 연주, 노래, 춤을 배워 발표회(온습회)도 열고, 지역 행사에 ‘재능기부’도 했으니, 이들을 지역 토착 1세대 공연예술인들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공연을 보아 줄 관객이 없다면,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허사가 된다. 좌식이라 1,000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던 앵좌는 임장 경관이 안전을 이유로 초과 인원을 돌려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앵좌와 청주공회당, 이 두 시설 모두 현재의 중앙공원 근처 서북쪽에 인접해 있었으니, 당시 남문로 일대는 공연문화 1번지답게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게다가 앵좌는 호객과 무성영화의 ‘효과음’을 위해 출입구 위에 다락을 만들어 소위 ‘오부리’밴드를 배치했다. 저녁마다 성안길이 들썩였지만, 주민들은 불만을 갖지 않았다. 즐길 거리가 귀했던 탓도 있겠지만, 타 지역처럼 일본인, 조선인 영업주의 영리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닌, 그 대관료를 청주읍 소방조의 기금으로 활용하는 공공의 대관극장으로, 읍 주민 모두의 시설로 여겼던 까닭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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