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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청주의 ‘첫 예술인 부부’ 김갑자와 김갑순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3.19 조회수 : 53

[2025. 03. 19.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22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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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로운 것은 일본 콜롬비아 관현악단 반주로 ‘토끼화상’ 대목을 부른 것이 1면, 최고 유행 가수였던 채규엽의 노래에 부부가 가야금과 바이올린으로 반주만 한 것도 1면 있다.

부부는 유달리 국악과 양악 크로스오버 음악에 공을 들였다고 할 수 있다. 양쪽 음악 모두에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서양음악 전공자 김갑순과 가야금 병창의 예인 김갑자의 만남이 이처럼 낯설지만, 새로운 음악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김갑순이 1905년 청주 남문로에서 태어나 청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며, 그곳에서 신문기자로도 활동한 적이 있는, 음악에 열정을 가진 청년이라고 했다. 귀국 후 서울이 아닌 청주로 돌아왔음은, 1929년과 1930년 바이올린 연주로 청주 앵좌극장 지역 예술인 공연 무대에 여러 차례 선 사실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 공연에는 청주의 영락관과 태평관 등 요릿집 예기들도 함께하고 있다. 극장은 서양음악을 공부한 김갑순이 우리 음악에 자연스럽게 귀를 뜨게 해준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갑자는 김갑순과 활동하기 전 청주 시장 내 금강각 요릿집의 “노래하는 미인으로 팬들의 피를 들끓게 한” 예기였다는 것, 그녀의 아름다운 음색이 1931년 두 예술가의 백년가약 계기가 되었고, 이후 부부는 청주의 자랑이 되었다고도 했다.

지역의 두 예술인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데는 콜롬비아사의 오디션 역할이 컸다. 이 레코드사는 1933년 11월 충북 청주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전속가수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김갑순은 이 자리에서 그 무렵 ‘핫한 유행가’, 채규엽의 ‘봉자의 노래’를 불러 충북 대표로 선발되었다. 이 노래는 간호사 출신 카페 여급 김봉자와 유부남 의학사 두 사람의 정사(情死) 사건을 소재로 한 것으로, 1920년대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 사건에 이은 최고 화젯거리로, 문화계에서는 ‘원소스멀티유즈’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김봉자는 본래 옥천 군서면 은행리 출생으로 본명은 ‘김갑순’이었다. 기연이랄까? 어쨌든, 金甲順은 金甲順의 사연을 담은 노래로 가수가 된 것이다. 지역 최초(?)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대중가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최고 엔터테인먼트 기업이었던 콜롬비아사와의 인연 덕분에, 그는 1934년 언론에 고악의 현대적 편곡에 열정을 지닌 청년으로 소개되고, 그들 부부는 경성방송에도 출연하고 25면의 레코드도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영예는 언감생심이었겠지만 말이다.

내친김에 이들 음반, 나아가 박팔괘의 가야금 병창, 보은 김석구가 만들어 이동백이 히트시킨 단가와 판소리들, 옥천의 정순철이 작곡한 동요 음반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아카이브 문화관’ 하나 있었으면 싶다. 이들 음반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음악은 소리판에 남아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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