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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충북 최초의 근대 공연 예술인, 박팔괘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2.05 조회수 : 47

[2025. 02. 05.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17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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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는 민족말살정책과 수탈 정책을 표면상으로나마 수정, 소위 ‘문화통치’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탄압 아래서도 제한된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전환점을 마련, 주권 회복을 위한 청년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문화예술 분야도 활기를 띨 수 있었다. 충북에서도 1920년 6월 청주청년회를 시작으로 거의 전 시군에서 청년회가 창립되었고, 그들은 지역 계몽이라는 공적 목적을 위해 소인극을 활용했으며 덕분에 주민들은 일상 가까이에서 극양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문화예술의 활기는 비단 연극 분야만이 아니었다. 그만큼 활성화한 분야가 있었으니 ‘국악’이었다. 1920, 30년대 이동백, 정정렬, 오태석, 김소희 등 국창급 명인들이 우리 지역 극장을 찾아 여러 차례 공연 기회를 가졌다. 또한, 소인극 활성화에 지역 토착 청년들의 역할이 중요했듯이 국악에서는 전통 예능을 익힌 각 지역 기생(청주에는 청주예기조합, 藝妓, 名妓로 호칭) 역할이 컸다. 그들은 매년 갈고닦은 실력을 발표하는 온습회(溫習會)도 열었고, 명절이면 시민 위안이라는 이름으로, 또 수해 등 각종 구제를 위한 자선행사 무대에도 기꺼이 섰다. 

 이 같은 국악의 활성화에는 청주 출신의 뛰어난 국악인 ‘박팔괘’의 영향이 컸다. 1880년 태어나 1946년에 타계했다고 알려진 그는 근대 예술이 본격화하는 1920년 훨씬 이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사실이 확인된다. 그는 우륵의 혼이 깃든 충북 출신으로, 우리 ‘전통의 가야금’을 배우고 연주해 온 조선의 광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Victor 레코드사가 1906년 제작에 들어가 1908년 발매한, 한국 최초 가야금 병창 음반(쪽판) 3매(새타령·자진산타령·토끼 화상)를 ‘한국 청주 율객 박팔괘’라는 이름으로 녹음했다. 소리를 녹음한 평원반이 이 땅에 처음 발매된 것이 1907년 3월이니, 그 선구적 위상과 함께 1906년 무렵 이미 그가 크게 알려진 예술인이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1914년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단성사(1907∼)’ 전속으로 6개월간 이동백, 이화(승무·법고)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고, 그는 가야금병창을 공연했다. 가야금병창은 가야금 연주에 노래(판소리, 단가)를 얹는 것이니, 악기 연주와 노래 실력 모두 뛰어나야 하고, 기악과 성악의 조화를 부릴 줄 알아야 제멋이 살아난다. 이전에 없던 이 양식은 영암 출신의 김창조, 혹은 지역(청주) 출신 김제철(석화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정적인 가야금 연주에 가창 연기를 보태 공연성을 극대화한 이 양식은 박팔괘에 의해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가야금 병창 음반 발매며 당대 최고의 흥행 극장 단성사에서의 장기 공연, 이후 전국 순회공연 기록 등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박팔괘는 우리 지역 예술인으로서 최초의 근대 극장 무대에 선 예술인이자,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지역 예술사에서도 기록되어야 할 점은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도 늘 근거지를 우리 지역으로 하고, 지역 예술계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자신 역시 유명 예술인으로서 경향의 내로라하는 국악인과 지역과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로, 지역 국악계를 풍요롭게 했다는 점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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