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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소인극과 충북인 최초의 연극 공연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1.08 조회수 : 54

[2025. 01. 08.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13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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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충북에서 맨 처음 소인극을 시작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191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1916년 12월 문을 연 청주의 앵좌극장 역시 경향 각지 신파극단의 공연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필시 우리 지역 청년회의 소인극도 이러한 신파극에 자극받았을 것이다. 예술 역시 입문기(?)에는 모방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서울과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여러 학생극단이 청주를 찾았다. 물론 이 학생극단 중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킨 이들은, 일본 동경에서 결성된 극예술협회가 주도한 동우회 순회연극단(순극단)이었다. 이들은 1921년 7월부터 8월까지 여름방학을 활용하여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했다. 극단을 이끈 이는 목포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실험적인 극작가로 활동하다 1926년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情死한 김우진이었다. 김우진만큼 그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절친’ 진천 출신 조명희였다. 이 순극단의 주 레퍼토리는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였다. 이들 연극은 비록 학생들 소인극이었음에도 기존 신파극에서 벗어나 근대 사실주의극에 한 걸음 다가서게 한 연극사의 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는 연출 김우진의 역할 이상으로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死>라는 대본의 힘이 컸다. 신파적·관념적 요소도 있지만, 동경 유학생의 시난고난한 삶과 식민지하 청년의 고통과 반항을 인물 갈등을 통해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명희는 이 작품 앞부분에 등장하는 다소 장황한 ‘서사’ 역을 맡아 직접 무대에도 섰다. 그런데,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순극단의 애초 일정표(1921년 7월 29일)에 있던 청주 앵좌극장에서의 공연을 건너뛴 점이다. 조명희는 자기 작품으로 고향 무대에서 설 기회를 놓쳤고, 청주 시민은 연극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뿐만 아니라, 극단 일행과 함께한,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 윤심덕 성악의 막전 막간 공연을 볼 기회를 잃었다. 여름방학이라는 한정된 기간 장마철을 거쳐야 했고, 수해를 만나 길은 예사로 끊어졌다. 극 중 대사가 문제가 되어 當地 경찰의 조사도 받아야 했다. 부산에서 서울을 찍고 함흥에 이르는 전국 25개 도시 투어 일정은 애초부터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절반 일정의 소화로 끝났지만, 그들 공연은 전국 각 지방의 연극계, 소인극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 연극사는 1920년대부터 활성화된 이들 (유)학생들의 순회 극단 활동이 지방 소인극 태동에도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기술한다. 충북의 연극사에서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동우회나 학생들의 소인 극단 방문 이전부터 충북지역은 나름의 소인극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충북 최초의 소인극 공연 사례는, 동우회의 순극보다 1년 정도 앞선 1920년 8월 18일 저녁 8시 제천청년회가 수천 명이 운집한 제천읍내운동장 가설무대에 ‘조혼의 폐해’라는 작품을 올린 것이다(동아일보, 1920.8.28.). 이는 기록상으로, 충북인에 의해 공연된 최초의 연극 작품이자, 공연 주체, 제목, 장소, 일시 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전국 소인극 공연사에서도 가장 앞선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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