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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충북의 소인극과 지역 청년회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4.12.25 조회수 : 52

[2024. 12. 25.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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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소인극은 한국 연극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중 특히 중요했던 시기는 대중(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소인극 운동이 전개되었던 1920년대와 1945년 해방 직후 시기였다. 이 소인극(素人劇)은 1970년대 중반까지 문공부(지금의 문체부) 주최로 전국 소인극 경연대회(제1회, 1972)가 개최될 정도로 연극의 한 양식으로 존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추어 연극인이 주축을 이룬 소인극이 오랫동안 인정받고 존중받아 온 것은 굳이 ‘보몰의 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전문·전업 연극인으로만 살아서는 생계유지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은 더 척박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아마추어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인 전문성(전공)을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생긴 게 1959년(중앙대)과 1960년(동국대)이고, 우리 지역에서는 청주대학교에 1981년에야 연극영화과가 개설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 중에서는 내로라하는 충북의 연극도 1920년대 이 소인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기 소인극은 주로 계몽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지만, 도내 전 시군에 골고루 뿌리내린 소인극 활동이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충북연극의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북지역의 소인극을 주도한 계층, 최초로 근대극을 실험한 이들은 각 지역 청년회 소속의 청년들이었다. 언론자료에서 확인되는, 충북 최초의 청년회는 1920년 6월 19일 창립한 청주청년회다. 연이어 7월 11일에는 제천청년회가, 8월 5일에는 괴산청년회 등이 창립되었다. 이후 규모가 큰 지역에서는 읍면 단위에까지 청년회가 속속 조직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청년회의 창립 취지를 보면, 지역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풍속개량과 지식계발에 강조를 둔 데 드러나듯이 ‘계몽’에 바탕을 두고, 청년들의 각성과 시대적 사명을 강조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선각자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고, 신교육 실천을 위해 직접 야학도 설립하고 운영했다. 지역 현안인 유치원 및 사립학교의 건립과 운영을 위한 기금 마련에도 나섰고, 수해, 한해 등의 피해를 당한 재난민 구호에도 앞장섰다. 일제와의 갈등 속에 해체와 재창립을 거듭하면서도, 1920년 초반부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도내 각 지역에서 활동한 이들 청년회가 우리 지역 시민 사회 운동의 그 기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청년회의 이러한 공익적 활동 실천에는 문화예술, 특히 소인극이 빠질 수 없었다. 그들은 미신의 타파와 조혼의 폐해를 알리기 위해, 야학이나 유치원의 설립과 운영을 위해, 재정난에 빠진 사립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자연재해로 곤경에 처한 이재민을 돕기 위해 스스로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물론 그들 활동은 실내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순회연극단을 꾸려 장터를 비롯하여 지역 구석구석을 찾았다. 주민들은 기꺼이 그들의 소인극을 봐주었고, 형편에 따라 관람료를 지급했다. 관람료는 기금이 되기도 하고, 구호금이 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의 소인극은 계몽과 공공성 이들과 한 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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