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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지역 공연예술사의 서막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4.12.11 조회수 : 30

[2024. 12. 11.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08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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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시기인 1916년 12월 15일 앵좌 공연장이 문을 열었다. 개관과 동시에 국내 경향 각지 극단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고, 일본의 신파극과 구극(가부키) 단체의 대관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청주를 찾은 최초의 국내 공연단체는 1917년 2월 앵좌 무대에 올랐던 경성의 ‘광교예기조합’이다. 명칭에 드러나듯 예기(藝妓)로 주축을 이루었는데, 전통 가무, 신파극 등을 선보였다. 근대 초창기 공연예술을 꽃피우는데, 이 예기들의 역할이 컸다. 청주의 앵좌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른 공연 예술인들이 태평관과 영락관의 예기들이었던 만큼, 지역 공연사에서는 이들 존재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앵좌는 개관 당시부터 입장객이 하룻밤 수백에 달했다고 했다. 인기 공연에는 소위 ‘오픈런’이 다반사, 극장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안전 문제로 경관들은 최대 수용인원이었던 천 명 외 인원을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 같은 극장에 대한 열기는 비단, 오락거리나 여갓거리가 부족했던 탓만은 아니었다.

 공연예술은 무대 위의 연기자와 관객이 한 공간에서 소통하는 대면을 전제로 하는, 관객이 실망하지 않도록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실시간의 예술이다. 그래서 극장 안에는 늘 긴장이 동반되는데, 이것이 공연예술의 묘미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에는 하나의 긴장이 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관람객과는 다른 눈을 가진 임석경관의 존재 때문이었다. 원칙적으로 공연 전에는 레퍼토리를 해당 지역 관할 경찰서나 파출소에 신고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연극은 대본에 관한 사전 검열도 통과해야 했다. 그러고도 불안했던지 일제는 치안과 질서 유지를 이유로 공연 시에 임석경관을 배치했다. 하지만, 실시간 말의 향연이 펼쳐지는 무대, 관객의 뜨거운 반응에는 늘 애드리브가 ‘대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극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나아가 기대와 설렘, 조바심과 안달이 함께 했으니, 이 역시 공연 현장을 찾게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919년 8월 신구 합동 연극을 표방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신청일 일행을 시작으로, 1920년대부터는 ‘문화의 시대’에 걸맞게 우리 연극사에도 등장하는, 김소랑의 취성좌, 현성완일행, 형제좌, 배구자무용가극단, 낭예좌, 조선연극사, 신극시연무대, 신무대 등등의 다양한 극단이 ‘쇄도’했다. 이 가운데, 1924년부터 여러 차례 청주를 찾은 김소랑의 취성좌는 키노드라마(영상을 연극의 일부분으로 수용, 당시는 ‘활동연쇄극’)를 선보였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특히 뜨거웠다고 했다.

  이러한 상업극단 말고도, 동경과 서울의 유학생(고학생) 단체, 경향 각지의 청년회가 꾸린 소인(마마추어) 극단이 청주를 찾았다. 청주에서도 1920년부터는 청주청년회가 1925년부터는 청주여자기독교청년회가 이 앵좌를 근거지로 청주의 소인극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전문예술인과 생활 예술인의 구분이 없던 그 시절, 시내 대형 요릿집의 예기들과 함께 이들 청년이 지역 최초의 자생적 예술인이자 배우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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