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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일제강점기 청주극장사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4.10.16 조회수 : 14

[2024. 10. 16.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04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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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 명에 붙은 ‘座’(좌)는 일본식 극장 이름에 유래한 것이다. 다다미 바닥에서 앉아서 관람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2층 건물의 청주 앵좌는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한자 ‘櫻(앵)’은 벚꽃을 가리킨다. 당시 극장 설립에 관여한 청주 헌병대장 사쿠라이(櫻井) 소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을 만큼, ‘앵좌’에는 ‘일본 냄새’가 난다. 그런데, ‘앵좌’라는 이름의 극장은 청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대도시 중의 하나였던 평양에도 1914년부터 운영에 들어간 앵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을 보면, 평양의 ‘앵좌’는 물론이고 같은 시기 존재했던 충청권의 공주의 ‘금강좌’, 대전의 ‘천만좌’나 ‘대전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청주 앵좌는 활발하게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6년 한 해 앵좌의 공연 실적이 언론에 소개되어 있는데, 영화 상영은 177일이었고, 연극공연이 75일, 기타 흥행은 24일로 나와 있다. 이 기타 흥행에는 국악과 양악, 무용, 만담(야담), 마술 등이 망라되어 있다. 연간 276일을 문화행사로 채운 것이다. 이 앵좌는 신간회 등 단체의 회합 장소로도 쓰였지만, 본연의 역할은 ‘문화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동아 등의 우리말 신문과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해 펴냈던 일본어 신문을 종합적으로 살피면, 앵좌에서는 한국인 관객을 위주로 한 공연이 80∼90%, 10∼20%는 일본인을 위한, 가부키를 비롯한 일본의 신·구극, 무용 공연 등이 일본에서 건너온 단체들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하게 문화 관련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는, 극장의 독특한 운영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 극장이 주로 일본인 개인이나, 조선인 자본가에 의해 설립, 수익 사업에 치중한 것과 달리, 앵좌는 청주읍 관리하의 소방조합(위원회)이 주체가 되어 건립되었다는 점, 주로 대관 사업을 했는데 거기서 얻는 수익을 조합의 운영비로 충당하는 공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극장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앵좌를, 시민 모두의 것으로 여기고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후 일제의 검열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군국주의 광풍이 몰아닥치면서 지역 예술은 서울보다 더 빨리 암흑기에 들어간다. 시국에 협조하는 내용이 아니면 무대에 올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낡은 ‘앵좌’가 철거되고, 1937년 9월 25일 철당간과 이웃하여 우리 이름의 ‘청주극장’이 위용을 자랑하며 개관되지만, 해방 시기까지 이 ‘청주극장’은 지역 문화사에서 온전히 수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일본인 개인에게 위탁 운영되는 방식으로 변경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우리 지역의 공연예술을 꽃피우게 한, 진정한 극장의 역사는 1916년에서 1936년까지 20여 년간의 ‘앵좌극장’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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