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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충북 근대 국악사 그 일면, 청주의 김갑순과 보은의 김석구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5.03.05 조회수 : 70

[2025. 03. 05.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18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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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분에 청주를 찾은 외지 예술인과 단체 중에서도 단연 국악 부분에서 유명인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구극’ 혹은 ‘연희’를 표방하며 경향 각지 다양한 국악 단체가 지역을 찾았지만,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국보적 존재’로 칭해졌던 이동백(1867∼1949)을 비롯한 그 일행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동백이 충북을 자주 찾은 것은, 1914년 무렵 한때 서울 단성사 무대에 함께 섰던 동료로서, 또 비슷한 연배로서 오랜 친분을 유지해 왔던 박팔괘가 청주에 있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또, 이동백 자신은 비록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지만, 충북 진천에서 대대로 세거해 온 집안 자식으로 특히 그 증조부가 풍류를 좋아한 당대의 ‘율객’이었다고 하니, 그에게는 이 증조부가 자기의 소리 인생에서 ‘비조’가 되는 셈이고 그만큼 그에게는 고향 충북이 각별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언론을 통해 확인된 것으로, 이동백 일행의 충북 공연은 청주 앵좌에서만 세 차례가 된다. 74세 되던 1939년 3월 은퇴 공연 직전의 마지막 지방 공연도 증평극장에서였다. 청주에서의 세 차례 공연은 1929년 1930년 1935년에 각각 이루어졌다. 보도에서 공연 주체를 이동백과 10여 명 일행이라고만 했다가 그 면면을 소개한 것은 1930년 10월 사흘간의 가을 공연인데, 이 공연에서는 청주의 박팔괘도 함께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5년 2월, 이틀간 열린 설맞이 공연에서는 이동백을 비롯한 전 출연진 이름이 소개되어 있는데, 정정렬, 오태석, 한성준, 신금홍 김유앵, 변진홍, 김소희 등으로 당대의 스타급 명창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당시 언론은 이들의 공연이 "반도의 젊은 가슴을 뛰게 했다"고 적고 있다. 

 1920, 30년대 충북 지역에서 이같이 활성화한 국악 분위기는 우리 국악사에 기록될 만한 전문 국악인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이는 청주의 김갑순과 김갑자, 보은의 김석구다. 김갑순은 1920년대 후반부터 앵좌 무대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등장하여 1933년 무렵부터는 구악(단가 등)의 현대적 편곡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가야금병창 음반을 꾸준히 낸 김갑자의 가야금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 이중주를 시도하여 음반도 내고 방송국 출연도 함께 했다. 필자가 아는 한, 그들은 한국에서 양악과 국악의 크로스오버 뮤직을 시도한 최초의 음악인들이다.

 한편, 김석구는 양반 출신으로 송만갑, 이동백 등으로부터의 사사와 독학을 거치면서 우선 연구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구전 가사의 오기를 바로 잡고, 특히 창극조 가사와 창법의 조화에 관해 연구했으며, 이를 평론으로 써서 대중들에게 알렸다. 이를 바탕으로 이동백의 ‘백발가’를 비롯하여 ‘충청가’, ‘경기가’ 등 많은 단가와 판소리를 직접 창작도 했다. 따라서 그는 지역 최초 국악 평론가로, 또 창작판소리의 창시자로 부를 만하다. 그러다가 1938년 42세 나이에 독창회를 열고 소리꾼으로 데뷔, 스스로 ‘비가비’(양반 출신 광대)가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독창회도 열었다. 그의 공연에는 스승 이동백을 비롯하여 정정렬, 김창룡, 한성준, 오태석 등의 당대의 명인들이 모두 찬조 출연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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