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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충북 지역 공연예술사의 첫 장을 연 앵좌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4.10.30 조회수 : 57

[2024. 10. 30.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06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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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좌는 1인 사업주의 영리 목적이 아닌, 청주읍(지금의 청주시)이 관여하고 읍 소방조합이 운영 주체가 된 ‘전문 대관극장’으로 설립, 그 수익금 역시 조합 운영비 등의 공공 목적으로 쓰였다. 앵좌의 이 ‘대관’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주체는 청주에 있는 각 신문사지국이었다. 당시 청주에는 ‘삼남의 雄道’답게 10개 가까운 지국이 들어와 있었고, 각 지국은 개별적으로 혹은 연합하여 ‘독자 위안’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물과 영화를 유치했다. 우리말 신문으로는 동아와 조선을 비롯하여 중외일보, 매일신보 등이 일본어 신문으로는 부산일보 등이 적극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주청년회를 이끈 지도자로 동아일보의 지국장 역할까지 겸했던 ‘김태희’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신문사의 지국은 중앙 문화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으면서, 청주시민의 문화적 욕구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들은 섭외에 유리한 전국적인 네트워크망과 언론 매체로서 자체 홍보 수단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구독자 확보라는 목표가 있었겠지만, 문화주의를 표방하며 그들이 기울인 노력은 초창기 지역 공연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시민의 눈높이를 고려한 공연물을 유치했고, 입장료를 지원했다. 당시 앵좌극장의 입장료는, 대체로 대인은 3,40전, 소인은 그 절반이었다. 해당 신문의 구독자에게는 반값의 할인권을 배부, 시민들은 비교적 저렴한 입장료로 공연과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수용인원이 최대 천 명까지로, 저렴한 입장료로도 대규모 모객과 수익을 낼 수 있었던 좌식(座式) 극장 구조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1916년 12월 개관과 동시에 경향 각지의 극단과 영화단체가 밀려들었고, 개관 초기부터 앵좌를 찾는 관객이 매일 밤 수백 명에 달했다고 언론은 기록하고 있다. 시민들은 이른 시기인 1920년 7월 이미 스타 변사 서상호와 함께하는, 유니버셜사의 ‘명금’(The Broken Coin)을 즐길 수 있었고, 각 공연예술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명창 이동백과 정정렬, 무용수 최승희·배구자·조택원, 성악가 현재명, 대중가수 채규엽을, 그리고 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조선의 애인’으로 불리던 신일선도 ‘실물’로 대면할 수 있었다. 

  언론을 종합하면, 공연 분야는 연극, 국악, 서양음악(피아노, 성악, 오케스트라 등), 만담, 무용, 마술 등으로 전 범위에 걸쳐 있다. 좋은 극장과 훌륭한 작품은 그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예술을 꿈꿀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는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청주 출신 예술인이 배출된다. 한국과 일본의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든 함귀봉, 최초로 바이올린과 가야금의 퓨전 음반을 냈던 김갑자·김갑순 남매는 따라서, 우연한 산물이 아니었다. 좋은 공연 예술가가 되는 방법은 우선 좋은 관객이 되는 일이다. 공연을 보고 심장이 뛴 경험을 갖지 못한 이가 훌륭한 공연 예술가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앵좌’는 충북 최초의 극장이자, ‘문화예술학교’였다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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