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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미디어파사드와 충북의 전등사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4.09.04 조회수 : 89

[2024. 09. 04.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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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9년 에디슨이 상용 전구를 발명한 지 불과 34년 만에, 역사학자 에밀 루트비히 표현대로,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발견한 이후 그 두 번째 불을 청주 사람들도 대면하게 된 것이다. 

 누가 주도한 것일까. 有城貞次郞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과 조선인 유지의 후원으로 청주전기회사가 설립되고 1912년 2월 인가를 받으면서 본격화되었다. 1914년 2월 기준 자체 전기회사를 둔 도시는 남북한 통틀어 12곳이었으니 아주 이른 편이다. 도내 지역과도 비교되지 않는데, 충주가 1926년 11월 2일, 경부선 통과로 3대 도시를 다투던 옥천, 영동이 1927년과 1928년, 그외 지역은 1930년 이후에야 가능했다. 단양은 1937년 1월 첫 점등을 하는데 청주의 점등 후 무려 23년여 만이었다.

 전등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도 읽을 수 있다. 청주에 첫 전기가 들어온 1913년의 9월, 외곽에 살던 한 포목상이 청주 장에서 물건을 팔고, 술 한잔하고 돌아가는 길에 ‘청주발전소를 지나다 눈이 부시도록 전기 광채가 나는 것을 구경타가 실족, 우물에 빠져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 이 휘황한 광채를 뿜었던 청주발전소는 당산의 명장사 자리에 있었다. 1926년 11월 충주에서는 잠업품평회에 맞춰 점등을 개시했는데, ‘품평회관광’보다, ‘전등관광’을 위해 찾은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밝은 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잦은 정전, 비싼 전등료는 지역 신간회 등의 주요 의제가 되었다. 특히 지역별로 시차를 두고 개시된 전기는 지역 불균형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지역 내에서도 일본인 중심으로 수혜가 돌아갔다. 1931년 1월 7일자 조선일보의 문답 형식 ‘불평란’에는 ‘청주 不平生’이 올린 물음이 있다. "시내 일본인 사는 곳은 가로등을 굉장히 켜고, 조선인 사는 곳은 10년을 두고 기다려도 캄캄하니 이게 차별 아니오?" 청주 부면장의 답이 ‘걸작’이다. "조선인촌의 가로등 설비가 불완전한 것은 전봇대가 없는 탓이지 결코 조선인 차별은 아니오." 하지만, 전등은 극장개설과 공연 문화, 미술전람회 등의 새 문화의 장을 열게 했고, 벚꽃 가지에 매단 전등은 청주를 전국적인 야간관광의 명소로 만든다. 이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서 잇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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