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매일] 충북도청사 건립과 함께 지워진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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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인 1937년 10월 15일 낙성식(落成式)을 가진 문화동의 충북도청사는 충북도민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중앙공원에 소재했던 2천 평의 구 도청사 부지는 발전, 성장해 가던 도 행정의 심장 역할을 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했다. 또한 1908년 6월 충주에서 관찰부를 옮겨오면서, 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비어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의 병영 건물을 사무공간으로 그대로 사용했으니, 당시 표현을 빌자면 쇠락할 대로 쇠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동(당시 성동정, 城東町)에 위용을 갖춘 도청사의 이전·건립은 총독부발 충청남북도 합도설과 충남으로의 도청 이전설에 맞서 충북도를 지키고자 지역사회가 한마음이 되어 이뤄낸 결과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 지역사에서 중앙공원에서 문화동으로의 도청사 이전과 관련하여 누락한 부분이 있다. 1930년 4월 청주시가공원(신설공원, 청주공원, 시내공원 등으로도 표기) 건립기부터 도청사 건립 공사가 본격화하는 1936년 7월까지 약 6년간의 역사다. 이가 온전히 메워져야 청주시와 충북도의 협치, 청주시(당시 청주면, 1931.4. 읍으로 승격)의 ‘도청 사수’를 위한 노력을 제대로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문화동에서 꽃피웠던 ‘화양연화(花樣年華)’ 시기를 제대로 복기할 수 있다. 충북 도지(道誌)를 비롯한 공식 기록에는 논을 메워서 문화동 도청사를 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37년 현 청사 건물이 들어서기 전 1930년대 도청 자리를 찍은 사진을 보면 이미 논이 아니다. 운동장도 보이고, 규모를 갖춘 건물도 확인된다. 이 공간의 정체가 바로 그해 가을에 개최될 전조선 곡물상 대회를 앞두고, 1930년 4월부터 청주시가 조성한 청주시가공원이다. 물론, 이 7천 평 규모의 근대 공원은 지역에서 여태껏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야구와 축구를 겸할 수 있는 그라운드를 비롯하여 공원 내 서북쪽으로는 청주시가 운영한 청주도서관과 충북도가 관리하던 물산진열관(산업장려관 전신), 더 위쪽 도청농협 자리에는 복수의 코트를 갖춘 연식 정구장도 있었다. 풍치를 돋우기 위해 인공 연못이 조성되었고, 벚나무 등이 식재되었다. 마땅한 휴게, 공원 시설이 부족했던 청주시가 야심 차게 조성한 교양, 체육, 전시, 휴식 기능을 겸한 복합문화공원이었다. 이 공원과 인접하여 성동정의 옛 읍성터를 따라 1916년 일제가 심어놓은 벚꽃이 군락지를 이뤄 중부 조선 최고의 명소로 손꼽힌 앵마장(櫻馬場, 우리 신문에서는 ‘꽃동산’으로 표현)도 함께 했다. 해마다 4월 중하순이면 ‘관앵(觀櫻) 데이’라 하여 벚꽃 관광열차가 공원 인접한 청주역(당시 상당구 북문로 위치)까지 경향 각지 상춘객을 실어 날랐고, 문화동 일대는 북새통을 이뤘다. 1936년 5월 청주시는 충북도청사의 건립을 위해 7천 평의 이 공원 터를 충북도의 2천 평 청사 터(중앙공원 자리)와 맞교환했다. 그해 7월부터 도청사 신축을 위한 성토 공사가 시작되면서 시가 공원의 시대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어차피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도 문화도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니, 일제강점기 지역문화의 빛나는 한때는 이 시가공원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좀 더 차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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