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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과 충북의 대응 ② 1931년의 시민운동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6.06.17 조회수 : 42

[2026. 06. 17.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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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경상·충청·평안·함경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었으며, 충청북도 역시 이때 탄생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의 간섭이 노골화된 것이다. 1905년 외교권 박탈에 이어 1907년의 한일신협약 이후에는 내정은 물론이고, 지방행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일제는 통치와 관리의 수월성을 우선했다. 그 일환으로 주민 의사와 상관없이 1908년 평안북도와 충청북도의 도청 소재지가 영변과 충주에서 철도노선이 인접한 신의주와 청주로 옮겨졌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그 연장선에서 1925년, 진주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을 감행했다. 같은 시기 충청 지역에서도 도의 통합과 도청 소재지 이전 문제가 관심사가 되기 시작했다. 행정 경비 절감을 이유로 총독부가 면적이 좁은 충청남북도를 다시 하나의 도로 통합할 것이라는 풍설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이에 충청권 각 지역에서는 통합 충청도의 도청 소재지가 어디로 결정될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도청을 고수하려던 공주 지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1월 총독부는 충남도청 소재지의 대전 이전을 공식화했다. 동시에 이러한 결정이 행정구역 개편을 염두에 둔 것이며, 조만간 충청남북도는 합병에 당면하리라는 전언이 청주에도 전해졌다. 충북도민, 특히 청주 지역에서는 유지, 관공리, 상공업자들을 중심으로 부랴부랴 시민대회를 열고 총독부에 반대 진정을 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양 도 통합에 관한 좀 더 신빙성을 가진 소식이 전해졌다. 4월 26일자 오사카 아사히 신문 조선판에 총독부 재무국 사계과(司計課, 조선 전체의 재정을 관장하던 실무 부서) 과장인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의 인터뷰 "충남북도를 합병하여 경비를 절약한다"는 요지의 내용이 청주에도 전해진 것이다. 충격에 직면한 청주 사회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반대 운동에 나선다. 5월 2일 청주공회당에서는 시민 천오백 명이 운집하여 합병 반대를 위한 시민대회를 열고, 그 대응책을 마련한다. 이 자리에서 의료인이자 당시 도평의회 의원이었던 이명구(해방 후 3대 도지사)는 ‘일본과 조선의 합병에 이어 오늘 충북을 합병한다면, 두 번째 합병을 당하는 것’이라고 발언하여 임석 경관의 주의 조치를 받는다(조선일보, 1931.5.3.). 그의 행동이 전체의 의사를 대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통합 반대 여론이 심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리에서는 총독부에 보낼 진정 위원이 선발되었고, 합병 반대를 위한 대안도 제시되었다. 행정, 재무의 효율성을 이유로 통합을 추진하려는 총독부 정책에 반대할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면, 우선 도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쇠락한 도청사(중앙공원에 소재)를 새롭게 수축하자는 것, 인접 지역을 편입하여 충북의 확장을 꾀하자는 안 등이 대두했다. 물론 이 중에 늦게라도 실현된 것은 1937년의 충북도청사 신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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