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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1908년 충북 관찰부(도청) 이전의 내막 새글핫이슈
기고자 : 임기현 연구위원 신문사 : 충청매일 게시일 : 2026.03.25 조회수 : 7

[2026. 03. 25.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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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과 지방의 행정, 치안(경찰), 일부 사법기능까지 관장하던 내부(행안부)에도 기노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가 차관으로 임명된다. 

 일제는 국권 침탈 과정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비롯하여 지방 민심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그만큼 지방행정 장악이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 1908년 1월, 각 도청(관찰부)에 일본인 서기관을 배치했다. 순종 황제는 1908년 5월 11일에 각 도의 서기관을 소집하여, "짐은 일본과 새 협약을 체결케 하고 전적으로 일본의 원조와 지도로 나라의 정사를 개선하고자 하니... 각 도의 서기관은 힘을 다하여 관찰사를 돕고 군수들을 지도하여 짐의 뜻에 부응하라"라는 어명을 내리기도 한다(순종실록).

 물론, 이 자리에 도청 이전을 추진한 충북도 서기관 가미야 다쿠오(神谷卓男)도 함께 했다. 여기에서 이전 논의까지 있었는지 왕조실록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2주 후(5.25.)에 순종은 충주에서 청주로 도청소재지 이전을 전격적으로 발표한다. 

 오오쿠마 야사부로(大熊彌三浪)의 『청주연혁지(1923)』에서도 도청 이전은 이 가미야 서기관이 내무 차관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추진한 일로 기록하고 있다. 가미야의 논리는 이러했다. 충주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요로에 자리했으나, 경부철도 개통(1905)으로 일시에 치우친 땅이 되어 서울에서 육로를 이용하면 3일, 뱃길을 이용하면 일주일이나 소요된다는 것, 덧붙여 충주가 의병 근거지라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방 통치를 해나가는 데 크게 불편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가미야는 청주에는 당장 청사를 옮겨갈 만한 유휴공간이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중앙공원 자리에는 1895년 충북도가 생기면서 지역의 치안과 방어를 목적으로 진위대가 들어와 있었는데, 1907년 8월 군대 해산 후 병사와 부속 건물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1908년 5월 25일 순종 재가 후 5월 29일자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세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도청 이전은 6월 5일 혹은 6월 6일(황성신문) 일단락된다. 왕의 재가 후 10여 일 만에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민의 반응을 확인하기 어렵다. 신속하게 추진된 점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도청 이전이 가져올 영향력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던 듯하다. 이는 1924,5년 진주에서 부산으로 경남도청을 이전할 당시 양쪽 주민들이 보인 반응과는 크게 다르다. 

  이리하여 1908년 6월 충북 관찰부는 중앙공원에 둥지를 틀고, ‘청주 시대’를 열게 된다. 인구가 유입되었고, 산업과 경제 제 방면에서 도내 타 군과 격차를 벌리며 도의 수부로 성장해 간다. 하지만, 1920년대 들면서 청주에도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총독부가 충남과의 행정통합과 함께 도청소재지를 옮겨간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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