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잊힌 예술인, 청주의 김갑자와 김갑순 | |
[2025. 03. 05. 발간] [충청매일 - 오피니언 - 칼럼 - 지역사읽기] ※ 오피니언 121번 게시글 내용과 이어집니다.
내친김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지역 출신 근대 예술인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발굴과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고대해 본다. 전국을 무대로 국악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박팔괘를 비롯하여, 김석구, 김갑순, 김갑자 모두 해방과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그 행적이 묘연하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스스로 그만두기도 했겠지만, 질곡의 한국 현대사로부터 예술인들 역시 자유롭지 못했던 탓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인 상당수가 일제 탄압이 본격화하는 1930년대 말부터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여, 극한 좌우 대립에서 어떤 선택도 가능했던 혹은 강요당했던 해방기를 거치면서, 연이은 동족 살해의 한국전쟁기와 전란 후 공고화된 분단 체제를 겪으면서 깔끔하게(?) 잊힌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최대한 그들을 찾아내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선배 예술인에 대한 도의이자 공백투성이인 지역 예술사를 제대로 메우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식민지 척박한 문화 예술 토양 위에서 예술의 싹을 틔우고, 그 험로를 개척해 갔던 그 노고는 반드시 존중받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예술인 중에서도 청주 출신의 김갑순과 김갑자에 대해 부연하기로 한다. 이른 시기, 가야금 병창과 바이올린의 크로스오버를 시도, 총 23면의 음원을 녹음하고, 방송에도 출연한 김갑순과 김갑자에 대해서 그간 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져왔다. 1930년대 당시 언론이 주목한, ‘조선 고악 편곡에 열중한 청주 청년 김갑순’을 참고하여, 그가 청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특정했고 김갑자의 가야금과 자신의 바이올린 이중주를 시도한 점에 주목, 동서양 음악 모두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추정해 왔다. 한편, 김갑자는 고수 한성준과 짝을 이뤄, 박팔괘에 이은 가야금 병창 음반을 비롯하여 예의 가야금과 바이올린 이중주 음반, 또 가야금 병창과 관현악단과의 협연 음반을 낸 ‘여류 명창’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간 김갑순과 김갑자의 관계는, 남매지간으로 추정해 왔다. 이름도 그러하거니와 1933년 콜롬비아에서 유성기 음반 부록으로 발행한 가사지에 실린, 둘이 함께 찍은 사진(1995년 LG 미디어에서 낸 복각 음반, ‘가야금과 바이올린의 만남, 김갑자·김갑순’의 앨범 재킷에도 실려 있음.)을 보면 빼다 박듯 닮았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 손위고 아래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 왕성한 활동을 펼친 1930년대 중반 그들 나이도 이 사진을 참고하여 20대 후반으로 추정해 왔다. 하지만, 추정은 실증에 반할 때가 많다. 우리말 신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싣고 있는 당시 일본어 신문 등을 검토하면, 그들은 남매가 아니라 ‘부부’였다. 김갑순은 1905년 청주 출생으로, 일본 유학을 거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리고, 네 살 아래인 김갑자는 청주의 고급 요릿집 ‘금강각’의 예기(藝妓)였다. 두 예술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한국 크로스오버 음악의 새 장을 열게 한 한 계기가 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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